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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총동창신문(21년 6월 519호)]에 '서울대 순국·참전 동문 이야기' 쓴 당시 재학생들 인터뷰 기사 게재
  • 작성자자유전공학부
  • 날짜2021-06-24 11:10:47
  • 조회수430
[서울대 총동창신문(21년 6월 519호)]에 2017년 자유전공학부가 국가보훈처의 지원을 받아 수행한 '서울대 순국 동문 스토리텔링 사업'에 참여하였던 당시 재학생들 인터뷰 기사가 게재되었습니다.

기사 원문 링크: https://www.snua.or.kr/magazine?md=v&seqidx=10013
 

[519호 2021년 6월] 뉴스 > 기획
 
평화로운 나의 오늘은 참전 선배들이 남겨준 선물
 
   ‘순국·참전 동문 이야기’ 쓴 당시 재학생들 인터뷰
 

2017년 당시 모교에 재학 중이던 학생 9명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동문 9명의 삶과 죽음을 재조명했다. ‘서울대 순국 동문 스토리텔링 사업’을 통해서다. 자유전공학부가 국가보훈처의 후원을 받아 약 6개월 동안 추진한 이 사업의 최종 결과물이 올해 3월 책으로 발간됐다. 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순국 및 참전 동문으로 대상이 확대됐고, 참전 후 서울대에 입학해 수학한 동문이 추가됐다. 생과 사의 장벽으로 갈리고 저마다의 사연으로 쪼개졌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그들도 꿈 많은 청년이었다는 것, 오늘날 캠퍼스를 누비는 대학생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까마득한 후배들이 다시 까마득한 선배들을 돌아보게 된 건 70여 년 세월을 뛰어넘은 동질감 아니었을까. 사업에 참여한 당시 재학생 중 황승민(경영12-18), 이동현(자유전공13-21), 이지민(사회교육14-19) 동문과 내년 2월 졸업 예정인 송주상(자유전공10입), 군 휴학 중인 김도건(간호16입) 학생 등 연락이 닿은 5명을 직접 만나거나 전화와 이메일을 활용해 인터뷰했다.
 
평전·대담·논픽션 등 다양한 형식
전몰·참전 동문 9인의 삶 재조명

지금 우리처럼 꿈 많았던 청년들
더 많은 사람이 오래 기억했으면


-스토리텔링 사업 참여의 계기는 무엇인가.
(황승민) 2017년 당시엔 북한이 잇따라 미사일 발사 실험을 강행하는 등 전쟁 위협이 고조되던 때였다. 어렸을 때부터 가족 여행을 전적지나 통일전망대로 다녀와 북한과 한국전쟁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모교 선배들의 참전 이야기를 발굴한다니 무척 흥미로웠다.

(송주상) 언론계 입문을 위한 일종의 포트폴리오로 시작했다. 계기는 이기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다. 저보다 어린 나이에 처자식을 두고 전장으로 나간 분들이다. 그 마음이 어땠을지 감히 상상하기 힘들다. 제 능력과 열정을 통해 그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후대에 전하고 싶었다.

(김도건) 어렸을 때부터 역사를 좋아했고, 이회영 선생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분들을 동경해왔다. 그들의 삶을 돌아보고 기억하는 일은 매우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지민) 전공을 공부하면서 거시적· 정치적 담론 하에서 교육의 방향을 논하는 것은 그다지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좋은 교육은 현장에서 구체적인 학습자의 상태, 학습 환경을 고려할 때 가능하다고 본다. 같은 맥락에서 주로 거시적·정치적 사안으로 다뤄지는 전쟁, 국가, 안보 등의 문제에 대해 미시적 관점에서 접근해보고 싶었다.

(이동현) 어릴 적부터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아 ‘역사 공부’를 넘어 ‘사학’을 하고 싶었다. 2016년엔 국대안 파동을 주제로 자율연구를 수행하기도 했다. 미군정보고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속기록 등 1차 사료를 직접 읽고 분석하면서 2차 연구물들을 탐독했었다. 그런 까닭에 해방직후사에 속하는 한국전쟁은 적어도 학술적 접근에 있어선 마치 어제나 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개인 혹은 조를 편성해 순국 및 참전 동문 9명을 나누어 맡았다. 해당 동문을 선택한 이유나 조사하는 과정에서 인상 깊었던 일화에 대해 말하자면.
(이동현) 외할아버지가 1·4 후퇴에 즈음하여 이등중사로 참전하셨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참전한 외조부와 당대 엘리트 코스를 밟았던 서울대 선배 전사자, 그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고 싶었다. 제가 맡은 노갑병 선배는 1950년 6월 모교 법대에 입학했다가 단기사관학교를 거쳐 1951년 3월 임관했다. 성적이 우수해 한달 남짓 교관으로 복무하다 전선에 투입됐고 불과 일주일 만에 전사했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왔다면, 월남한 반공주의자라는 정치적 신원보증과 미군정 이후 인맥 형성의 기제로도 작동한 기독교의 도움을 받아, 비교적 수월하게 전후 남한 사회의 지도층으로 진입했을 것이다. 반면, 외조부는 백마고지 전투 속에서도 죽음을 피하셨고 화랑무공훈장을 수훈하셨다. 전후 남한 사회 형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진 모르지만, 나를 포함해 후손을 남기셨다. 두 삶을 대비해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황승민) 제가 맡은 박명근 선배는 불과 열여섯 살의 나이에 자원입대해 최전방에서 복무하다 1951년 총상을 입고 이듬해 제대했다. 그 뒤 미군부대 경비원으로 일하며 고등학교 과정을 독학했고, 1954년 모교 의대에 입학했다. 전장에서 쓴 일기를 엮어 2008년 ‘소년병의 일기’를 출간했는데, 이 책이 단서가 돼 현재는 미국에 살고 계신 선배를 이메일로 인터뷰할 수 있었다. 연락을 드렸을 때 무척 좋아하시면서 현재 20대가 6·25전쟁에 관심을 갖고 뭔가 해보려는 것에 대해 오히려 감사하다고 말씀해 주셨다.

(김도건) 제가 맡은 이중희 선배도 참전 후 생환하신 분이셔서 전쟁의 참상이나 상처에 대해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학자 겸 사업가로 활동하고 계시는 선배를 이메일로 인터뷰했었다. 정전 후 긴 시간이 흘렀건만, 보내주신 답장엔 당시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음식물 찌꺼기라도 얻어먹으려고 미군에게 말을 붙였던 게 계기가 돼 선배는 통역관으로 채용됐었다. 피난길에 굶주림에 시달리던 그가 미군의 제안을 거절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임시로 중위 계급장을 받아 미군과 함께 최전방에 갔다 온 선배는 나이를 두 살 올려 한국군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선배는 “고위 장교들이 전방에서 지휘하는 미군과 달리 한국군은 최전방에서 대위 이상의 장교를 본 적이 없고 불쌍한 사병들만 실제 전쟁을 했다”고 회고했다. 북한군의 포위망이 조여와 죽어가는 전우를 참호 속에 두고 혼자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일을 두고두고 마음 아파했다.

-참전 용사이자 서울대 출신 엘리트로서 전후 한국 사회를 재건하는 데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중희 동문이 이민을 떠난 이유는.
(김도건) 선배는 1957년 모교 공대 졸업 후 한국조폐공사에 입사했다. 공사는 조폐지, 궐련지, 우표용지 등을 국산화하기 위해 뉴욕 ‘샌디 힐 제철소’에 기술 이전을 요청했고, 현지 엔지니어를 초청해 작업에 착수했다. 그런데 모든 제조법이 영문으로 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간부들은 영문 편지의 위아래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영어에 무지했다. 소위 ‘빽’으로 들어온 그들은 입사자격에 병역필을 명시한 것과 달리 대다수가 병역기피자이기도 했다. 미국인 엔지니어와 의사소통이 가능한 직원은 선배를 포함해 둘뿐. ‘기수보조’에 불과한 그 둘이 산더미같이 쌓인 설계도면과 제조방법을 공부해가며 기능공을 가르쳤다. 국산화 성공 후 선배는 조폐공사의 잘못된 조직을 바로잡아달라고 요구했지만, 공사는 외려 그를 병역기피자로 몰아 파면시켰다.

-호국의식을 심어주는 것 못지않게 지키고 싶은 나라가 되는 것도 중요할 것 같은데.
(김도건) 광복 직후 친일파 숙청 등 과거사 정리를 제대로 못 했던 게 이러한 부조리의 한 요인이 아닐까 싶다. 참전 용사뿐 아니라 현역 군인, 소방관, 경찰 등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위해 헌신하는 분들을 그에 걸맞게 대우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

(송주상) 동의한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미국의 국방력은 막대한 예산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군인을 예우할 뿐 아니라 물심양면으로 돕기 때문에 국가를 지킨 국민을 국가가 다시 지킨다는 믿음이 있다. 이러한 믿음이 국방력의 밑바탕이 되는 건 물론이다. 반면 한국은 징병제를 시행하는 까닭에 대다수의 남성이 군대에 갔다 온다. 그래서 그런지 군 복무를 별거 아닌 일, 그저 당연한 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지민) 스토리텔링 사업에 참여하면서 우리나라 남성이 지력, 체력 등 유의미한 생산력이 정점에 있는 20대 황금기를 쪼개 나라에 바친다는 게 얼마나 큰 희생인지 새삼 깨달았다. 철원으로 다 같이 전적지 답사를 간 적이 있다. 그곳에서 카메라가 북쪽을 향하면 지켜보던 북한군이 사진을 삭제하라고 요구할 수 있으니 촬영을 삼가라고 주의를 줬다. 서울에서 차로 조금만 가면 도착하는 곳, 같은 대한민국의 영토 안에서 일상적인 사진 촬영이 제한될 수 있다니. 새삼 휴전 중임을 실감했다. 군역을 짊어진 남성들이 감수하는 건 비단 복무하는 시간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합리적인 병영 문화와 군인에 대한 처우 개선, 전역 후 지원 제도 등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한다.

(송주상) ‘태극기 휘날리며’, ‘포화 속으로’ 등 한국전쟁 참전자, 전사자의 삶을 그린 영화가 대중의 큰 공감과 호응을 얻은 바 있다. 군 복무를 둘러싼 남녀갈등의 해법도 공감에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청년의 울타리에서 서로를 돌아본다면 풀리지 않을까.

-남편을 잃고 평생을 엄마로서만 살아온 어느 순국 동문 부인의 이야기는 전장 밖에서 여성이 겪었을 고통을 대변하는 것 같다.
(이지민) 침략 당한 나라의 민간인 여성은 적국의 군인들에게 인권을 유린 당하는 경우가 매우 흔했다. 또한 남성이 전장에 나가 싸우는 것과 별개로 사회는 계속 유지돼야 했기에 여성이 생산활동과 육아를 도맡는 등 많은 일을 떠안아야 했다. 전쟁이란 극한의 상황은 남녀를 불문하고 커다란 고통과 희생을 강요하는 셈이다.

(송주상) 우리와 다르지 않았던, 당시 청년이었던 선배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해줬으면 한다. 왜 그들이 전쟁터로 떠났는지, 어떤 꿈을 꿨던 분들인지 안다면 우리가 우리의 청년 시절을 더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선배가 후배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이 아닐까 생각한다.

-4년의 세월이 흘렀다. 졸업은 했나? 현재 하는 일과 계획이 궁금하다.
(김도건) 의무경찰로 복무 중이다. 당시도 지금도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고 해결방안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최선을 찾기 위해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었다. 스토리텔링 사업에 참여했던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송주상) 2019년 언론계에 입문해 IT조선을 거쳐 현재 조선NS 기자로 일하고 있다.

(이동현) 감정평가사 자격증을 따려고 공부 중이다. 자산관리를 중심으로 여러 분야에 관심이 많다. 차후 회계사, 변호사 자격증도 취득할 생각이다.

(이지민) 로스쿨 재학 중이고 곧 졸업한다.

(황승민) 다른 대학 로스쿨을 졸업하고 군 법무관으로 훈련을 받고 있다. 실제 총을 만지고 사격을 해보니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상상해볼 수 있었다. 그전엔 묵념을 해도 좀 형식적으로 느껴졌는데, 지금은 순국선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게 됐다.

나경태 기자

 

<서울대 순국·참전 동문 이야기>

 2017년 국가보훈처의 지원을 받아 수행한 ‘서울대 순국 동문 스토리텔링 사업’의 최종 결과물로 당시 모교 재학생이 조사, 집필했다. 전몰 동문으로 김세환(국문47입)·김중만(상학48입)·권석홍(섬유공학48입)·노갑병(법학50입)·윤필효(축산50입)·서찬식(약대) 동문, 참전 동문으로 이중희(섬유공학50-57)·김익창(의학56졸)·박명근(의학54-60) 동문의 이야기를 다뤘다. 중간 발표를 거쳐 논픽션과 서간문, 평전, 대담 등의 형식으로 결과를 다듬어 책으로 엮기까지 3년이 걸렸다. 책은 비매품으로 학내 구성원에게 배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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